퀴어로 사는 건 대체로 편안하고 결정적으로 불편한 일. 맞춤옷을 입은 듯 자유로운 동시에 보이지 않고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매일 진을 치는 느낌이다. 퀴어로 사는 일은 싸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제든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 것만 같다.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속 편한 변명을 하면서.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퀴어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 때문에 말을 아껴왔다. 나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소한 기억이나 좁은 이해로 일반화하게 될까 두려워서다. 사랑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퀴어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계속 듣기만 했다. 하지만 사랑이 오고, 관계가 깊어지고, 어떤 상대가 내 생활에 들어오자 침묵한 시간을 돌아보게..
11월 1일 금요일, 만년필의 날에 만년필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평생을 함께할 만큼 좋아하는 것을 써야 했다면 다른 소재를 택했겠지만(그림, 책, 애인. 그중 제일은 애인이어라), 마치 에세이스트가 된 양 내가 ‘아무튼, OOO'을 쓰게 된다면? 그럼, 두말없이 ‘만년필’이다. 아니, ‘오늘도 또 사버렸어, 아뿔싸!’ 아뿔싸, 만년필일까. 첫 만년필은 2010년쯤에 산 펠리칸 M200 모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10만 원대는 중저가 만년필에 포함되지만, 주말 알바로 겨우 용돈벌이를 하며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대학원생이 펜 한 자루를 그 돈 주고 산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되팔 생각도 안 했는지 영문 이름을 떡하니 새겨놨더랬다. 만년필이 왜 좋았을까. 어릴 ..
평일 저녁 10시쯤에는 대체로 소파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 사람이 누우면 다른 한 사람은 누운 이의 발치에 앉아 무릎 위에 상대방의 다리를 올린다. 내 무릎 위에 놓인 그 사람의 발은 하얗고, 발가락은 길고, 내 손에 꼭 맞는다(물론 쏙 들어온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발은 다른 일을 할 때, 심지어 자는 중에도 움찔거리고 꼼지락대는데, 우리는 이 두 개의 발을 또 다른 생명체로 여겨 장난치기를 즐긴다. 발에 인사하고, 발에 말을 걸고, 발의 대답을 듣는다. 시무룩한 발, 즐거운 발을 본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우리 둘의 애정 행위다. 그의 발을 만지면서 멍하니 있거나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기도 한다. 담요 아래에서 발을 왼손으로 꼭 쥐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길 때면 옛 중국 문인들이 전족한 여성의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