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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저녁 10시쯤에는 대체로 소파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 사람이 누우면 다른 한 사람은 누운 이의 발치에 앉아 무릎 위에 상대방의 다리를 올린다. 내 무릎 위에 놓인 그 사람의 발은 하얗고, 발가락은 길고, 내 손에 꼭 맞는다(물론 쏙 들어온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발은 다른 일을 할 때, 심지어 자는 중에도 움찔거리고 꼼지락대는데, 우리는 이 두 개의 발을 또 다른 생명체로 여겨 장난치기를 즐긴다. 발에 인사하고, 발에 말을 걸고, 발의 대답을 듣는다. 시무룩한 발, 즐거운 발을 본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우리 둘의 애정 행위다.
그의 발을 만지면서 멍하니 있거나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기도 한다. 담요 아래에서 발을 왼손으로 꼭 쥐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길 때면 옛 중국 문인들이 전족한 여성의 발을 만지며 글 쓰고 책 읽는 취미가 있었다는 기분 나쁜 얘기가 생각난다. “나 지금 완전 발 패티시 있는 중국 남자”라며 농담을 해도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내 애인의 발은 전혀 작지 않고 나에게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어쨌든 그를 만나고 발 패티시라는 게 왜 생겼는지, 내 입장과는 다르게 이해는 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발과 이렇게나 가까워지다니 하고 놀란다. 덩달아 내 발까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내 발은 크고 못생기고 관리도 안 되어 있어 20대 내내 늘 감추고 싶었고 그만큼 더 내 몸이 아닌 듯 멀리해왔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은 슬리퍼를 신고도, 맨발로도 밖에 잘만 다닌다. 물론 애인의 발을 좋아하는 것과 내 발에 익숙해진 것 사이에는 아주 희미한 심리적 연결고리가 있을 뿐이고, 연애 기간에 시작한 요가가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누군가를 통해 나의 일부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생각하는 게 즐겁다.
한번은 여느 저녁처럼 소파에 가만히 앉아 애인의 발을 꼭 잡고 있는데, 내가 이 사람을 잘 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어 살짝 놀랐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다른 사람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더라도 지금 내 손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이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착각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이런 순간은 확실히, 우리가 늙고 더 힘이 없을 때를 상상하게 한다. 그가 보살펴야 할 존재가 된 모습을 말이다. 누가 먼저일지 그때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아플 테고 이렇게 서로의 손과 발을 주무르면서 저녁 어쩌면 낮까지 이런 상태로 보낼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영원히 함께할 테고, 그 시간이 온다고 해도 슬프거나 애석하진 않을 거라는 무모한 확신이 든다.
그 속에 머무는 것도 잠시, 그 아래에 깔린 옅은 불안이 불현듯 커지곤 한다. 그 순간이 오면 슬프겠지. 우리는 계속 함께할 수도 없겠지. 만에 하나 우리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버리면 어쩌지? 우리는 같은 속도로 나이 들지 않을 테고, 같은 강도로 보살필 수 없을 텐데 그때가 너무 힘들어지면 어쩌지? 발을 쥔 손에 잠깐 힘을 뺐다가…
다시, 한 마리 여리고 여윈 짐승을 다루는 마음으로 그의 발을 어루만진다. 어디로 갈 수도 없고 어디로 가지도 않을, 조금은 기력이 빠진 그런 동물. 그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에서 한 마리 예쁜 여우를 본다. 자유롭게 숲속을 거닐다가 밤이 되어 잠든 내 여우, 내 불안도 감싸주는 온기 가득한 발, 몸, 인간 동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