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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저항이다

신학자, 연구자인 트리샤 허시의 책. 꽤 앞부분에서 흑인해방신학 이야기가 많이 나와 중도 하차할 뻔했다. 하지만 읽다가 그만두는 걸 반복하면 독서의 리듬이 깨져서(4월에 그랬더랬지) 어제오늘 집중해서 읽었고,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 흑인 노예제라는, 오래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자본주의, 백인우월주의, 가부장제, 장애인차별주의 등에 대한 저항으로서 ‘휴식’을 저항적 실천으로 삼자는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의 정신을 담고 있다. 휴식과 여가, 명상이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되는 이때에 그 어떤 디톡스 책보다 의미 있는 책이다. 우리가 쉬지 못하도록 문화 전체가 공모해 몰아가는 통에 몸 상태에 귀기울이고 휴식을 취하려고 하면 극도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 사실을 우리가 폭력적인 체제에 조종당하..

2026.05.10

에디토리얼 라이팅: 생각을 완성하는 글쓰기

잠깐 북저널리즘의 뉴스레터를 유료 구독한 적이 있다. 이 뉴스레터는 적어도 필진이 세 명은 있어야 소화할 수 있는 발행주기로 꽤 긴 글을 발행했다. 인상적이었던 던 글이 고르게 좋았다는 거다. 주제도 시의적이었고 글도 잘 정돈되어 있고 문헌 조사도 충실히 이뤄진 글이었다. 다만 글쓴 사람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아서 결국 북저널리즘이라는 곳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겠거니 하고 이연대 북저널리즘 대표가 쓴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에디토리얼 라이팅’도 ‘생각을 완성하는 글쓰기’도 썩 매력적인 제목과 부제라고 생각하진 않고, 또 이 책이 기획자, 작가, 글쓰기에 관심 있는 초심자 중 어느쪽도 뾰족하게 타기팅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학 제외하고) 자신의 책을 기획하고 쓰거나 남의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

2026.05.06

평등한 아름다움

풀꽃 이름을 수집하고 있다.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무와 풀이 많은 파주에서 새로 찾은 취미다. 주차장에서 회사까지 500미터 남짓인 그 짧은 거리에도 시기마다 다른 꽃들이 피고 지니 지겨울 틈이 없다. 주로 땅을 쳐다보며 걷는 평소의 버릇도 영향을 주었겠다. 처음에는 회사 바로 앞에 심긴 크고 화려한 청보라색꽃이 눈에 띄어 찾아보았다. 클레마티스라는 낯선 이름이었다. 창가에 걸린 그림을 보느라 늘 곁눈질하며 지나가던 작은 화실의 입구에는 줄기가 굵고 꽃이 큰 분홍색 수선화가 피었다. 주차장 펜스를 따라 핀 노란 꽃들은 다 비슷해 보여도 잎의 모양에 따라 씀바귀, 고들빼기 등으로 구분된다. 괭이밥, 벳지 같은 작은 꽃잎들이 무리를 이룬 모습은 어찌나 귀여운지 출근길에도 멈춰 서서 한참 구경하곤 했고, ..

에세이 2026.03.25

제주 겨울 나무

나의 첫 제주도 여행은 2017년 11월의 가족 여행이었다. 네 식구 모두 제주도는 처음이라 성산일출봉, 용두암, 만장굴, 함덕해수욕장, 레일바이크, 아쿠아플래닛 등 유명하다는 제주의 관광지를 찍으며 여행했고, 그래서인지 난 제주도의 매력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왜 제주도를 좋아하고 자주 찾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엄마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실려 다니며 그냥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11월인데도 바람이 하도 많이 불어 어딜 가든 바람에 두들겨 맞고는 겨우 몇 분 만에 자리를 떴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제주 지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지 못해 3박 4일 동안 제주도의 한산한 도로를 동서남북으로 수없이 오간 게 여간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 ..

에세이 2026.03.09

눈은 따듯하다

2월이 되니 찬기운이 누그러든다. 2026년 입춘은 2월 4일이었다. 음력으로 2025년 12월 17일로, 한겨울이라 할 법한 날에 봄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2월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가지에는 겨울눈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어디에서는 강이 얼어붙는데 어딘가에서는 파종이 한창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무는 앙상히 메말라 있고, 사람들은 패딩을 입고 종종 걸음을 한다.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건 입김, 겨울의 끝을 알게 해주는 건 시리지 않은 바람 아닐까. 아무리 3월의 꽃샘추위가 무섭다고 해도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온도는 겨울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 그렇게 겨울의 기후는 감정보다는 몸으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눈.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겨울 날씨로 눈을 빼놓을 수 없다. 눈..

에세이 2026.03.04

작은 마음으로 갖는 작은 희망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를 반가운 마음으로 사놓고 한동안 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큰 호기심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황정은 작가가 12.3 계엄날부터 4월까지 그가 생각하고 분노하고 함께하며 느낀 바를 쓴 일기에 가까운 에세이다. 작가님은 주로 토요일 집회에 참여하신 듯한데, 글 속에서 묘사하는 상황과 구호들이 눈과 귀에 선하다. 몇 개월 동안 그의 지근거리에서 함께 추위에 떨며 구호를 외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의 마지막 부분에 광화문 촛불 집회 장면이 나오는데, 작가님은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 문제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며 글을 쓰고 계시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을까? 본 ..

에세이 2025.10.20

내가 사랑하는 비효율

상어 잡고 부들부들하다 보니 8월이 다 갔다. 오늘은 상어를 절대 집에 데리고 오지 않겠다며 큰소리치고는 오늘도 상어 데리고 왔다며 울상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상어를 다 잡고선 부들이 문제라며 부들부들거린다. 나는 스트레스 요인이 있으면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데, 그게 서로 지겨워서 색인과 보도자료에 지어준 별명이다.​색인은 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찾아보기’다. 특히 사회과학서나 학술서에 들어가며, 독자가 찾고자 하는 내용을 수월하게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장치다. 핵심 표제어를 내림차순으로 목록화하고 표제어 옆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간 페이지를 넣어준다. 인디자인에 페이지를 찾아주는 기능이 없지는 않고 일차로 페이지를 뽑아내 검수를 하면 된다는 얘기를 디자이너에게 들었지만 아직 주변..

에세이 2025.09.06

수요일의 글쓰기 수업

난생처음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글쓰기를 배우는 것 자체보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 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낯설고 두렵다. 첫 주에는 다행히(?) 시간이 모자라 나의 차례 바로 앞에서 합평이 끝나긴 했지만, 선생님의 코멘트가 적힌 종이를 받아 읽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됐고, 그 코멘트를 참고해 글을 고쳐보려 했지만 내 글을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입시 때는 매일 합평을 했다. 학원 교실 벽면에 친구들 그림과 함께 내 그림을 펼쳐놓고 공개 지적 받는 게 일이자 시험 공부였다. 대학에 가서도 뭘 하든 결과물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야 했다. 혼자서 꼼지락거리는 작업도 뭣도 아니었다.그때는 내가 한 작업을 공개적으로 평가받는다는 게 그렇게 ..

에세이 2025.05.06

감각을 더하는 일

걸어서 출근하는 날엔 가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생각한다.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 때문에 왠지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과 웃을 때 초승달 모양이 되는 눈, 왠지 서글서글한 느낌을 주는 입 주위의 주름 등. 그 이미지에 취해 있다가 덜컥 늙어서 눈이 안 보이게 되면 어쩌지 걱정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운 뺨, 낮고 독특한 음색, 자주 쓰는 향수의 풀 냄새 같은 것 등 다른 감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놓였다. 많은 것을 나눈 사람이 있다는 건 꽤 좋은 일이구나.좋은 풍경을 보면 그것을 사진보다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 (물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열에 한 번 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더 깊이 느끼고 싶어서다. 비록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덜 아름답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동..

에세이 2025.05.06

비자발적 독서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십 대 때 읽은 책 중에 기억나는 건 학급 문고 책장의 옆자리에 앉은 계기로 우연히 뽑아 든 《테스》와, 집에 있던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읽은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가 다일 정도다. 그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인터넷 소설도, 할리퀸 로맨스도 안 읽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은 건 대학교 때. 방학 때마다 자기계발 목적으로 유명하다는 책을 숙제하듯 읽었다. 그 목록을 적어내려 갔던 기억은 있는데 어떤 것들을 읽었는지는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소유》나 《탈무드》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같은 것들이 이 목록에 들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독서 목록이었다.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차별적인 관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에세이 2025.05.05

그림을 배울 수 있을까

최근 새로운 경험을 했다. 친구가 인천 지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림 모임을 기획하면서 내게 그림 작가로서 모임을 이끌어달라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드로잉 클래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해왔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먼 훗날의 일로 미뤄놨었는데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왔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게다가 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모임이라 신청자들에게 수강료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몹쓸 용기가 생겨 덥석 제안을 물어버렸다. 그로부터 한 달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걱정할 시간이.평소 ‘가르치는 일’이 가장 자신 없었다. 하지만 괴발개발 그리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 짧게 잡아도 20년 이상 그림을 그렸고,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사실이니 그림만큼은 알려줄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

에세이 2025.05.05

언니

최근 이사를 했다. 몇 년 전부터 가족, 동료, 친구 할 것 없이 언니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선언만 수십 번 하다가 전세난을 핑계로 애인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저 방 하나 옮길 뿐인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사를 결정한 2월 이후 내내 예민한 상태였다. 사실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고 짐을 싸고 용달을 알아보는 등의 실질적인 일보다는 언니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는가가 내겐 가장 큰 문제였다.한동안 언니에게 이사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애인 집으로 간다는 말은 했지만 같이 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밝힐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미안했다. 불편한 마음이 들자 아예 상황을 회피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나를 세대주로 해 계약한 집을 재계약..

에세이 2025.05.05

불확실한 날의 글쓰기

어느 날,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을 하는데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갑작스러운 변희수 하사의 부고 때문인가 싶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며칠 전부터 회사에서 영 의욕이 없었다는 생각에 살짝 자책하는 기분이 되었다가, 봄이 오고 있어서 그런가 하고 하늘을 보다가, 약을 안 챙겨 먹어서 그런가, 들어가서 약부터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느끼는 답답함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서로 분리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하나의 원인을 밝히기 쉽지 않다.이런 실체가 없는 불안은 익숙하다. ‘경험’과 ‘배움’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혼란 속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지만,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에겐 실패와 회복을 반복하는 능력은 강하고 유능한 사람의 얘기로만 들린다. 인생..

에세이 2025.05.05

자기 알기의 함정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도의 가짓수는 많아진다. 그 시도가 무용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은 나를 위해서건 남을 위해서건 나와 거리를 두고 관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생긴 자아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리는 여러 가지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자아의 핵심에 놓고자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출세 지표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량화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가치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자아에 대한 인식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같은 사람에 비해 쉽지 않다. 그렇게 나와 남에 대해 생각할 때는 또 ‘나의 기준’이라는 단서를..

에세이 2025.05.05

당신 주변의 출판인

종종 지인들이 “내가 아는 출판계 사람은 무지밖에 없어서……”라며 내게 도움을 청한다. 그럴 때 통화 혹은 만남으로 내가 알거나 주변에 문의를 할 수 있는 한에서 의견을 준다.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럴 때 내가 편집한 책이 원하는 꼴로 잘 나와서 좋은 반응을 얻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다. 왠지 전문가가 된 기분이랄까? 다만 ‘어떤 원고를 써야 출판이 가능한지’, 원고에 관련된 질문에는 적절한 답을 해줄 수가 없다. 그보다는 이 원고는 어떤 구성으로 다듬으면 좋겠느냐, 어떤 것이 더 필요할 것 같으냐, 어떤 디자이너와 잘 맞을 것 같으냐, 어떤 그림을 쓰는 것이 좋겠느냐, 어떤 종이와 사양으로 만들면 좋겠느냐 같은 ‘책 만들기’에 관한 질문이 반갑다.늘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에서 있는 듯해 조바심이..